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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의 한계돌파방안-V-up002

작성자: Mun Tokyun

앞에서 6의 한계돌파방안으로서 살펴보고자 한 내용이 길어서 나누어 쓰고 있지만,
이제 대강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생명은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좋음(+) 나쁨(-) 둘다 아닌 것(0) 으로 나눈다.
그 내용은 각기 상황따라 다르다..
파리는 썩은 음식을 좋다고 여기고 사람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여하튼 그런 상태에서 각기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출발하게 되므로,
그 정체나 인과관계에 대해 잘못 판단 분별을 한 상태에서
본능적 감성적으로
좋음(+)에 집착하여 탐욕을 갖고 나쁨(-)에 집착하여 화를 낸다.
그리고 이 모두는 쾌, 이익을 추구하고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1]


이 1로부터 불쾌, 손해를 받는 측이 있으면 앞과 같은 원리로 그에게 다시 화를 내 불쾌, 손해를 가한다. -[2]

제 3 자들은 이 둘의 잘못을 따져 각기 불쾌, 손해를 가해 제지한다. -[3]
또 무시 방관하는 이도 있다. -[4]

처음 1, 2 단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이들을 무시 방관하는 것 역시 모두 문제상태로 보았다.
4와 같이 개입하지 않고 단지 무시 방관만 하는데 왜 그것이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1, 2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며, 방관자는 이를 직접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관은 이를 예방하거나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결국 앞 단계와 함께 얽혀 불쾌 손해를 나눠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나 군대가 서로 부딪혀 싸울 때
직접 싸우는 두 군대에서만 사상자가 나오지는 않는다.
군인보다는 대부분 일반인 어린이 여자,,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물론 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직접 원인은 군대가 벌이는 전쟁행위를 통해서다.
그런데 직접 싸우지 않고 이를 피해다니기 바쁜 일반인들은
직접 싸우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더 많은 피해를 받게 되는데,

이런 사정으로 자신은 이 원인도 아닌데도 애꿎게 다치고 죽어간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이 사태에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선 그 싸움을 처음 막는 데 이바지 못하고 방관한 것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기울이고 이를 미리 예방하고자 애쓰고
또 치유시키려고 애를 썼다면 이런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아 자신이 얽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집안에서 싸움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하튼
방관하며 마음편하게 지낸다고 하여 이로 인한 피해를 면하고
이들 불행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4의 경우도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1,2,3,4의 단계 모두가 서로 고통을 주고 받는 범위 안에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


이처럼 기본적인 문제 상황으로 보는 것은
생명 대부분이 감성과 본능에 충실하여 이에 이끌려
얕은 지혜와 함께 정글의 법칙에 의존해서 행해 나가는 1, 2, 3, 4가 문제다.


생명 대부분의 출발과 머무르는 상황이 이와 같은 바탕에 있다.
아마존의 정글이나 아프리카 초원을 놓고 각 생명을 살펴보더라도
그 모습의 아마 99.9999 %가
이 1, 2, 3, 4의 원리에 의해 충실하게 얽혀가는 과정임을 볼 수 있다.


사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의 피라미드 체계를 놓고 살펴보면,
물질 -> 생산자 -> 소비자 -> 분해자 -> 물질 의 순환을 이루어

A는 B가 먹이로 하고 그 B는 C가 먹이로 하며,,,,이것이 최종적으로
돌고 도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역시 A는 주변의 같은 동종 유사한 종들과는 역시 경쟁관계에
놓이며 이 순환을 이뤄간다.


그래서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가 코끼리 새끼를 코끼리 부모를 피해 잡아 먹었는데
코끼리 부모는 며칠 지나 사자 부모가 사냥을 나간 사이
그 사자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 모두 밟아 죽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미는 개미대로 벌을 벌대로 일정한 군집을 형성하여 이와 같은 생태계를 구성해 나간다.

자연을 놓고 보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보아야 할 이런 현상은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축생계에서의 원리다.

이것을 자연스럽고 모범적인 원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행동원칙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해나가면,
결국 자신이 직접 축생계 원리를 이해한 바탕에서 그 상태를 직접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 생태계의 피라밋의 최상부에 오른다해도
그 자신이 비록 왕이 되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러나 넓게 우주를 놓고 보면 이는 사실
한 침팬지 왕 물개의 왕 또는 여왕개미나 여왕벌과 같은 존재가 된 것에 불과하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축생계에 존재하는 법칙,
그리고 자신에게 내재된 본능과 감성을
거슬러 벗어나오기는 쉽지 않다.

모든 생명의 상황이 사실 비슷한 것이므로,
생명의 전체 수를 놓고 따지면 축생계에 머무는 수가 훨씬 많고 인간이 되는 경우는 적다.

또 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이치로
지옥이나 아귀 상태에 갇혀 고통받는 생명의 수가 산과 같다면
이를 벗어난 생명의 수는 손바닥의 흙만큼 그 차이가 난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눈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축생이나 인간은 그래도 이 보다는 나은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게 보이는 쉬파리나, 나방과 같은 곤충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는 의미다.


일찍이 doctr 님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차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먹, 싸, 놀, 하, 쉬, 자고- 라고 간단히 표현한 바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미생물과 곤충을 놓고 우리 인간을 비교해보면
혐오스런 곤충이나 인간이나
일상생활에서 각자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내용이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다 여기고 집착하는 내용은
각 개인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여기는가 하면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한마디로 생존과 즐거움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생존을 위해서 앞의 1,2,3,4의 각 방안을 택해
집착할 도리 밖에는 없다고 각기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록
앞의 1, 2, 3, 4과 반대 방향을 택해 벗어나기 위해
과거와는 반대되는 내용으로
남에게 쾌, 이익을 베풀고, 다른이의 선한 쾌, 이익을 따라 기뻐하고 - 5
다른 이가 행하는 불쾌, 손해를 참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6
대립하는 이를 모두 선한 방향으로 좋은 방안을 통해 이끌고 - 7
하는 여러 행위 유형을 택하더라도


우선 이를 즐겁게 행하기가 쉽지 않아 억지로 의무로 마지못해 행하기 쉽고

더 나아가 비록 이런 자세로만 살고자 해도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 문제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앞의 1, 2, 3, 4 를 다시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UP002///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들 7의 방안을 극복할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된다.

우선 이미 앞에서 축생과 같은
본능 감성적인 탐욕과 분노를 얕은 지혜를 바탕으로 어리석음에 빠져 추구하다보면
결국 축생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도리밖에는 없다.

이런 축생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하늘을 향해 가기 위한 방안은
결국 앞에서 행한 방향과는 반대의 내용으로 살아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는 본능과 감성적 욕구를 거슬러 행하는 것이어서, 실천하기 힘들다.

그래서 인간의 상태에서, 축생 상태를 향해 가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비율은 희박하다.


그래서 우선
1,2,3,4의 독을 제거하고 5,6,7을 행하되, 이를 즐겁게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이미 앞글에서 살폈다.

성인이 가르쳐준 내용을 믿고 받아들여 기쁘게 행하던지,

아니면,

앞의 1,2,3,4에서 벗어나와 그와는 달리 행하여
앞의 단계에서 얻게 되던 고통과 독, 악을 얻지 않게 됨에서
좋음을 보고 만족을 얻던지,


현실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 놓은 마음의 내용물이고,
그래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안에 이미 얻어 갖고 있고,
또 그 실재는 얻지 못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생각 관념은 모두 망상 분별에 의한 집착임을 깨달아,

기본적으로 집착을 버리고
그래서 생명, 신체, 재산, 가족, ,, 등등을 잃거나 얻거나 유지하거나에 관계없이
늘 무방하고 괜찮다는 마음에 머무른 가운데

다시, 선한 뜻을 추구하여 즐거움을 얻고
또 다른 이들이 선한 일을 하는 이를 따라 기뻐하고,
등이 모두 그 방편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렵게 느끼는 부분은
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는 것에 집착하면
왜 오히려 자신이 원래 얻고자 하는 좋음을 얻지 못하게 되는가..

또 반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왜 반대로 늘 자신이 좋음에서 머물 수 있게 되는가,,
하는 점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일 자신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 것으로 인해
곧바로 자신이 그 악에 끌려가고 고통을 받게 된다.

돈은 중요시하지 않는데 명예는 중요시 한다면,
누군가 자신을 욕하거나 비방하면 자신은 고통과 악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나머지도 다 같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놓고
반드시 좋아하는 것을 취해 얻어야 하고
또 반대로 싫어하는 것은 절대 결코 얻어서는 안된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풀려나와야 한다.

또 그렇게 풀려 나와야, 자신의 좋음도 잘 얻게 되고,
또 남의 좋음도 잘 얻게 해줘 선하고 행복한 상태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늘 즐겁게 5,6,7을 택해 행할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그 주체만은 1,2,3,4의 독에서 벗어나오게 된다.

그것은 과거에 5,6,7을 의무감이나 억지로 불쾌를 견디며 마지못해 행하던 상태도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그렇게 행하는 이만은
과거의 단계에서 벗어나 선한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

그러나 그렇다해도
앞의 1,2,3,4의 형태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이전 단계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이외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전 단계에 묶여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비율은 대부분이 그 이전 단계이고
아주 극소수만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보게 된다.


따라서 그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살아가는 한
그 이전단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과 마주치게 되며
또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 5,6,7의 방식으로 임하면
그만은 여전히 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해도 오직 5,6,7의 방안만을 고집하면,
오히려 그것이 또 다른 독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수와 같은 성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예수가 계속 설교를 하고 돌아다닐수록
자신이 피해를 받는다고 여기게 되는 이들이 어딘가에 있게 된다.


또 석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석존이 성불한 후 설법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생긴다고 여긴 악마는
수시로 석존을 찾아가 석존이 빨리 열반에 드시기를 권유하고
재촉했다고 한다.

또 제바달다와 같은 경우는, 실제로 석존을 살해하기 위해 많은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경우에, 아무리 예수나 석존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충돌되고 그를 해치려고 시도하는 다른 이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이들과의 충돌에서
예수나 석존이 오로지 그들 뜻에 맞춰 나갈 도리는 없다.

그래서 앞에서 1,2,3,4의 반대방안으로서 5,6,7 등의 방안을 제시했지만,
오로지 이 방안만을 고집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독이 발생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5,6,7이 비록 과거의 방안보다는 좋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남이 모두 함께 선한 상태가 될 수 있기에
좋다는 것이다.

잘못 이를 이해하면 무조건
언제나 자신의 좋음은 완전히 버리고 추구하지 않아야 하고,
또 남의 좋음만을 우선하는 것이 좋다고 오해하기 쉽다.

이는 단순히 맹목적으로 남만 우선해 위하는 이타주의를
곧바로 선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우다.

그런데 예를 들어 다음 경우는 어떠한가.

만일 자신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돕는데
그 남이 또 다른 남을 무수히 해치는 이라면 어떻하겠는가.
또 악마라면 어떻하겠는가.

그래서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돕는 것을 그것만으로
곧바로 선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남에게 베풀고, 남과 같이 기뻐하고,
불쾌를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등은
자신과 남 그리고 그외 나머지 모두를 선한 상태로 이끌기 위함이다.

또 그렇게 하는데 5.6.7과 같이 행하는 것이
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좋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남과 자신이 충돌할 때는
오로지 남만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로
5,6,7의 방안이 제시된 것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원래 모든 것에 대해 꼭 이래야 한다.. 꼭 이렇게 되어야만 좋다는 고집이나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묶임에서 풀려나 늘 평안하고 즐거움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선한 상태를 실현하는데 있어서도 보다 좋은 방안을 택해 잘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1,2,3,4,5,6,7의 여러 방안 가운데
여러가지를 제한없이
앞의 목적, 즉 자신과 남, 그리고 그 외 나머지 모두를 선하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집착없이 선택해 행할 수 있음도 의미한다.

이전의 상태에서의 1,2,3,4,5,6,7과
지금의 1,2,3,4,5,6,7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집착과 얽매임의 있고 없음이다.

집착하고 얽매이면 얻거나 잃거나 뜻을 실현하거나 실현하지 못하거나,
모두 개인적으로는 번뇌와 고통의 상태가 되고 서로 서로 악을 행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집착하고 얽매이지 않으면 또 그 반대가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어느 방안도 다 괜찮지만,
그 가운데 무엇을 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택한다는 것인가..

자신의 좋고 싫음의 집착에서 풀린 이라면,
그 선택은
어떤 선택을 해야
나머지 이들과 자신을 모두 선하고 행복한 상태로 잘 이끌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해 좋은 방편으로 추구함을 의미한다.

외관과 형태가 같더라도 각기 자신의 좋음 싫음에 묶여 이를 고집 집착하고
묶여서 이리 저리 끌려다니며 고통받고 악을 행하는 것과,

앞의 상태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1,2,3,4,5,6,7의 모습이 서로 외형과 형식은 같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가 갖는
목적 마음자세 취하는 방편에 따라
결과도 의미도 다 달라지게 된다.

비유로 말하면,
물은 같아도 뱀이 마시는 물은 독이 되고,
벌이 마시는 물은 꿀이 된다는 말처럼,

자신의 좋음 싫음에 집착하여 추구하는 이가 택하는 것은 어느 길도
자신과 남을 해치는 독이 되고,

자신의 좋음 싫음에 집착하지 않는 가운데
모두가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상태가 될 수 있도록
택하고 노력하는 길은
자신과 남을 살리고 돕는 길이 된다.
여기에 희생되는 남도
더욱이 희생되는 자신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출발부터 끝까지,,


그래서 결국 즐거운 가운데 이를 잘 행하게 되니
불교에서는 보살이 이렇게 행하는 상태를 유희신통하며 노닌다고,,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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